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10월_인터뷰] "계수나무에서는 솜사탕 냄새가 나요" - 마을의 기억을 미디어로 기록하는 진관동 이야기

by 공동체미디어 2013. 10. 28.

[서울시마을미디어지원센터 뉴스레터 ‘마중’  2013. 10.31]

 

"계수나무에서는 솜사탕 냄새가 나요"

- 마을의 기억을 미디어로 기록하는 진관동 이야기

 

스이 (마중 객원기자)

 

'인터뷰 취재 갈 생각있어요? 진관동 일대 역사를 담는 프로젝트 진행하시는 팀인데'

 

갑작스런 문자메시지를 받고 약간 당황스러웠다. 인터뷰 제안을 갑자기 받아서가 아니라, 이것이 마을미디어 활동 인터뷰라는 것 때문이었다. 역사를 담는 프로젝트도 마을미디어 활동이 될 수 있나 싶었지만, 일단 넘겨받은 연락처에 문자를 남겼다.

 

며칠 후,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어렵게 문명희 님을 만났다. 인터뷰 장소인 '물푸레 카페'를 찾아 뉴타운 아파트 단지 안을 함께 걸으며, 문명희 님은 이 곳이 원래는 야산이었고, 원래는 어떤 나무들이 있었고, 이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덕분에 마치 동네 역사산책을 하는 것 같았는데, 아파트 단지에 누군가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내게는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오늘의 인터뷰 장소인 '물푸레카페'는 햇볕이 가득 쏟아지는 버드나무 숲 옆 아파트 단지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곳은 예전에 '못자리골'이라고 불렸는데, '(일조량이 풍부해서) 모판을 키우던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카페 안에는 부미경 님과 김지혜 님이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일러두기: 진관동 팀의 일정상 인터뷰가 중간에 끊기고 다른 날 김지혜 님을 만나 보충 인터뷰를 했으나, 맥락에 맞게 내용을 편집하였다)

 

스이: 오늘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사업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부터 설명해주시겠어요?

 

부미경(이하 ''): 우리가 왜 이 작업을 하려고 했지? 다 계기가 있는데. 우리 모두 다 각자의 계기가 있어요.

 

김지혜(이하 ''): 저는 응암동에서 되게 오래 살았어요. 그래서 그 곳에 대한 추억이 엄청 많죠. 유년의 기억, 나를 키워준 자연 풍경이라든가 사람들, 그 기억들은 여전히 다 있는데 지금 그 곳은 완전히 다 바뀌었어요. 20년 동안 거기서 살면서 몸으로 느끼고 그랬던 것들이 재개발이 엄청 크게 이루어지면서 아파트가 다 밀어버린 거예요. 아파트 거의 1000여 세대가 들어왔거든요. 백련산 힐스테이트 이런 식으로.

 

그 폭력을 고스란히 느꼈던 거죠. 그게 늘 남아있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컸던 것 같아요. 트라우마가 돼서 생각하면 울컥울컥해요. 아직도 그 근처는 못 지나가고. 내가 막 아끼던 나무, 풀 그런 거 다 기억하고 있는데 이제는 어디로 갔는지도 잘 모르고, 내가 어릴 때 묻어뒀던 그런 것들이 아직도 모두 눈앞에 선하거든요.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골목 이런 것들도 개발이라는 것에 의해서 사라졌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왜냐하면 용역들도 들어오고 우리 가족은 반대위도 하고 그랬는데, 동네가 한 순간에 유령마을로 변하면서그 과정이 되게 아팠어요.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가치들은 별로 평가되지 않고, 그냥 낯선 사람들이 와서 딱딱 체크하면서 몇 평 이렇게 숫자 놀음으로 할 때 그런 것들.

 

                         

 ▲ 인터뷰 준비 중인 김지혜 님(앞)과 부미경 님(뒤)

 

뉴타운을 지나갈 때도 너무 놀랐어요. 길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나는 여기가 은평구인지도 몰랐고, 너무 놀라웠어요. 특히 폭포동 지날 때 그 초입부터 바뀌잖아요. 근데 그게 내가 느꼈던 폭포의 이미지가 아닌데 그 때 저랑 같이 버스 타고 가던 우리 애가 어쨌든 잘 정돈되고 형태는 남아있고 하니까 ", 여기 멋지다" 이러는 거예요. , 이런 거구나. 이 간극을 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때 4대강 진행하고 이럴 때인데, 바뀐 모습은 분명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이전 모습을 모르면 보기는 좋을 수 있잖아요. 그게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남기고 싶기도 하고..

 

사람들 만나면서 나는 굉장히 울컥울컥해요. 다 내 이야기 같고. 그러면서 되게 힘들어요. 힘들기도 한데, 이걸 왠지 넘어서야 될 것 같은 그런 것도 있는 거예요. 그리고 또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우리 아이들한테 한 가지 이야기로만 마을이 다 꾸려지는 게 아니다. 그 안에 굉장히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걸 우리가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건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나는 좋아서 하는 일인 것도 있지만 나한테는 넘어야 될 산 같은, 그런 게 있어요. 그래야 그 동네를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씁쓸한 웃음)

 

: 2004, 5년 재개발 될 때 여기 옆에 있는 (문명희) 선배도 마찬가지이지만, 지역 시민단체가 은평 연대 등의 활동을 하면서 개발을 하더라도 좀더 계획적으로, 지역문화나 생태 그리고 역사 문화 유적들을 보존하는 상태에서 개발해야 한다는 요구들을 많이 했어요. 일부는 수렴되었지만, 기자촌이나 한양 주택 같은 경우는 싹 밀어냈어요. 폭포동은 원래 단독주택 택지를 조성해서 폭포동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존하고 물길도 살린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지금은 산 밑자락까지 아파트가 들어차 있어요. 상당히 많은 것들이 훼손되고 없어진 거죠.

 

저 같은 경우는 은평시민신문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부미경 님은 은평시민신문 창간과 함께 작년까지 일했다), 40대 정도 된 사람들이 은평에 대한 유년의 기억이 있는 거예요. 나 어릴 적 은평에 대한 기억이 다 하나씩 있어요. 응암동에 있는 신양 극장에서 자기 중고등학교 때 데이트했던 거(웃음), 폭포동 어디 언덕이 자기 데이트 장소였다는 거, 이마트 앞이 논밭이었을 때 거기가 스케이트장이었던, 그런 자기 기억들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기억들이 술자리에서 파편적으로 오갈 뿐인 거야.

 

그 이야기를 기록하자, 그래야 이미 은평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는 마을 이야기들을 남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벌써 몇 년 째 했는데도 실제로 그것을 쓰기가 쉽지 않는 거죠. 사람들이 공동 작업으로 참여해서 마을 신문 한 꼭지에 마을 이야기를 쓰는 일을 신문사에서 너무 해보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거죠.

 

사실 조직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못해요. 지금도 은평시민신문은 당장 눈앞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묵히고 차분하게 풀어내야 하는 그런 이야기들은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기록 사업은 신문사 영역 밖에서 따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걸 해보면 참 재미있겠다 싶었어요. 그 당시에 신문사에서 취재도 하고 시민단체들이 탐방 교육도 하고 했던 경험을 복원해내서 다는 못하더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맞물렸던 거예요. 선배는 또 다른 스토리가 있어요.

 

문명희 (이하 ''): 나 같은 경우엔, 2004년에 지역 시민단체 간사 일을 하고 있었어요. 지역이 개발된다는 소식에 원주민들이 굉장히 힘들어 했었거든. 초기에 뉴타운은 원래 밀집된 지역에, 주차난이 많은 곳에 만들기로 되어있었는데 여기는 전혀 그런 곳이 아니었어요. 농가 같은 동네였는데, 원주민들은 어이가 없는 거지. 원주민 반대가 굉장히 극렬했었어요. 지역 시민단체들이 모여서 연대활동을 하면서 그 분들을 많이 지원했죠.

 

지원활동하러 다니면서 이쪽 진관동을 자주 왔는데, 너무 귀한 곳이었어요. 못자리 골, 물푸레 골, 장묘 문화도 그대로 있고, 그 전에는 몰랐던 유물 유적 문화도 많고, 너무 보존할 만한 것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개발이 굉장히 빨리 진행됐던 거죠. 삽시간에 개발되면서 원주민들이 많이 쫓겨나고, 정착률도 떨어졌어요. 한양주택이나 기자촌 같은 경우는 지금 있으면 서울 마을만들기 사업에서 최고의 공간이 되었을 거예요. 스토리가 많이 있는 곳인데, 그런 안타까운 일들이 있었죠. 그래서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이 쭉 있었어요.

 

중간에는 골목을 찍기 시작했어요. RTV에서 재개발로 없어진 30여개의 동네 골목들을 찍자고 해서 세 군데 정도 같이 찍었어요.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고 나서는 RTV가 힘들어지면서 그 사업이 중단되었죠. 항상 재개발로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번에 프로젝트를 하게 된 건데, 뉴타운이 생겼어도 일부 원주민들이 여전히 살고 있고 그들의 기억을 이 때 기록하지 않으면 또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에 같이 사업을 하자, 이렇게 된 거죠.

 

스이: 처음에 동을 뜨신 분이 누구세요?

 

모두: 비슷비슷해요. 거의 세 명이 동시에늘 그런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 응암동 이야기는 몰랐어요. 다만 지혜 씨가 시민신문에서 그 동안 아이 이야기를 써왔는데, 이 프로젝트의 원래 취지가 아이 키우는 엄마들과 함께 동네를 탐방하고 기록도 하고 그걸 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혜 씨에게 이야기를 꺼내봤던 거죠. 그런데 알고 보니 나보다 훨씬 깊이 있는 고민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지금 사업에서도 굉장히 열심이에요. 이 사업의 주축이야 (웃음) 그러니까 건드린 것은 나이긴 했지만, 사실은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면 같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모두에게 있었던 거죠.

 

: 술자리에서 지나가듯 이런 이야기를 해 본 적도 많았으니까. 사실 나는 이 곳도 눈에 선해요. 못자리골에 들어오면 따뜻한 햇빛에 산자락이 호리병처럼 들어오면서 확 펼쳐져 있는 곳이 여기에요. 그래서 그 기억을 못 잊어. (웃음)

 


 ▲ 인터뷰가 진행되었던 물푸레 카페 (위)와 물푸레 카페 옆에 있는 못자리골 (아래)


: 나도 같이 다녔는데, 나보다도 훨씬 감성적이고 구체적인 기억이 많은 거지. 나는 그 때 사진 기록을 했는데 지금 보면 아 내가 이런 곳을 찍었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곳도 있어요. 워낙에 바쁘게 다녔으니까. 그런데 선배는 훨씬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 그러니까. 인연이지. 여기 못자리골에 물푸레 카페가 딱 생겼잖아. 여기서 이런 활동을 하고 있으니 인연은 인연인 거지.

 

 

 

스이: 사업은 현재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나요?

 

: 이 사업 이름은 아줌마들의 동네 탐방 나들이,라고 동네 아줌마들이 자기가 사는 동네의 이야기를 듣고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사업이에요. 주요 컨셉은 제일 많이 변한 동네를 대상으로 변하기 전후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거였구요. 그래서 제일 많이 변한 뉴타운 동네, 그러니까 진관동, 폭포동으로 대상을 정하게 된 거죠. 이 내용을 우리가 게시판에 올리거나 온라인상으로 알리지는 않았는데 말로 슬금슬금 퍼졌던 거죠. 함께 참여하시는 부미경 선생님이나 문명희 선생님도 모두 지역에서 활동하는 분들이시니까 주변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죠. 우리가 토박이를 찾고 있다, 3,40년 정도 거주한 원주민을 찾고 있다고 하니 사람들이 재미있겠다는 반응들을 보이더라구요.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인터뷰이들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면 어떤 분이 나와 이야기하는 도중에, 자기 아는 사람이 사진작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사진에 대한 동경이 있다고 하면서 '무슨 사진 찍어요?' 이렇게 물어봤죠. 그랬더니 재개발 사업을 찍는다는 거예요. '재개발요?' 하면서 '나 요새 그거 마을 프로젝트 하려고 하는데' 그랬더니 '이 쪽도 막 찍고 그랬어' 이러는 거예요. ', 우리 그런 사진 구하고 있는데' 하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되게 유명한 사진작가 분이었던 거죠, 강홍구 씨라고. 예전에 '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이라는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낮고 소외된 곳에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사진을 찍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내용이었는데, 그 분인 거예요.

 

또 다른 인터뷰이들의 경우는어렸을 때 기자촌에 사셨던 아주머니 한 분도 만났고, 동네 사람들 집 구조까지 기억하시는 전파상 아저씨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리고 살림 파티(은평구 소재 살림의료생협의 신입조합원 환영모임입니다) 때 우연히 만난 어떤 분은 어렸을 때부터 찍었던 사진들을 그대로 가지고 계셨어요. 동네를 남겨야겠다, 는 생각으로 찍은 것은 아닌데 워낙 어릴 적부터 이 곳에 사시다 보니 이 동네의 예전 모습과 변해가는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담기게 된 거죠. 그리고 주민센터에서 만났던 할아버지 할머니 분들도 있어요. 모두를 인터뷰할 수는 없지만, 옛날 공동체에 몸담고 계셨던, 그래서 마을이 변해가는 흐름을 아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죠.

 

그리고 뉴타운 이후 생겨나는 새로운 모임들도 만나고 있어요. 물푸레 카페도 대표적인 공동체이고, 며칠 전에는 은뉴밴드(은평 뉴타운 밴드)도 만났어요. 3년 정도 된 7인조 마을 밴드인데, 마을 축제에서 공연도 하시고 그래요. 리더 격인 분이 산새마을에서 되게 오래 사셨던 분이었어요. 어머니는 아직도 거기 사시고, 그 분은 개발 이후 뉴타운에 들어가셨는데 밴드를 모집하셨던 거죠. 지역에서 이런 것들을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 때 모인 7명이 한 달에 두 번씩 연습하시면서 계속 친하게 지내신대요. 다른 밴드들도 많이 보았지만 동네에서 밴드를 꾸려서 활동하시는 게 꽤 신선했어요.

 

스이: 사업 기간이 길지 않았는데, 꽤 많은 분들을 만나셨네요.

 

: 사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일이라는 걸 알았어요. 진행 도중에 어떤 분들을 만날 가능성이 늘 있는 건데. 11월 말까지는 인터뷰 마무리를 하고 소책자를 만들기로 되어 있어서,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마을 주민과 인터뷰 중인 진관동 프로젝트 팀

(가운데부터 오른쪽으로 문명희 님, 부미경 님, 김지혜 님)

 

: 처음 생각했던 것은 굉장히 거창했는데 실제로 진행하다보니 그렇게 다 담아내는 것이 만만치 않고 지원금도 적고(웃음) 사업기간도 짧고, 그래서 아마 충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런 것들이 또 하나의 스토리가 되면 다음에 마을 기록 사업을 하는 데 동력이 되고 관심 있는 사람들도 좀 더 모일 수 있는 여지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들어요.

 

스이: 오래하면 오래 할수록 좋은 사업인 건데 말이죠.

 

: 그렇죠. 일단 11월에 만들어낼 소책자가 완벽한 자료는 될 수 없겠지만, 계속 덧붙일 수 있는 시작점은 될 수 있겠죠. 그 후에 찾아낼 기억들에 대한 마중물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다른 동네들도 이런 자료를 접하면, 우리도 이런 이야기 있는데, 하면서 남기려는 움직임이 생길 수 있잖아요. 아이들에게도 소중한 역사로 남겨질 거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 덧붙여 가면서 마을의 역사가 잘 정리되면 좋겠어요.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 '일만 년의 지혜'라는 책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글이 아니라 말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아이들 앞에서 서너 시간은 이야기할 수 있었대요. 나는 책에서 본 내용도 그렇게 오래 이야기하기 힘든데 말이죠. 그렇게 전해질 수 있는 기억들이 사라져 가는 게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그 분들의 이야기를 녹취해두고 있어요. 이제 그 기록들을 잘 풀어내서, 근거가 될 만한 역사적 자료들이나 허락하시면 개인적인 사진들도 넣고, 직접 그려주시는 손 그림 지도들도 함께 담아서 60페이지 정도의 소책자를 만들 계획이에요. 구성이 조금 걱정이 되긴 해요. 기자촌이나, 한양 주택 같은 옛날에 유명한 마을 공동체 이야기도 담고 싶은데

 

스이: 한양주택이 어떤 곳인가요? 자주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 한양주택은 그 당시에는 많이 없었던, 계획 정비된 마을이었어요. 단독주택들이 모인, 대문도 집마다 다르고, 나름 신경 쓴 마을이었죠. 그곳도 이제는 다 밀렸는데, 사람들은 끝까지 반대를 하셨대요. 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까지. 이미 공동체가 이뤄지고 사는 데 불편함이 없는데, 갑자기 개발을 한다고 하니 그렇게 싫어하셨다고 하더라구요.

 

사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 이야기들이 그냥 들리지 않아요. 강홍구 작가님을 만나 뵈었을 때 그 분이 '재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남기는 것은 당사자들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어요. 저는 그 분이 그걸 어떻게 아나 싶었어요. 이런 작업을 하다보면, 울컥울컥하던 순간이 많거든요. 그 때 심정들이 다시 밀려오니까 남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거죠. 제가 그걸 어떻게 아시냐고 물어봤더니, 그 분은 토박이가 아닌데 또 관찰자로 있다 보면 마을에서 배제되기 쉬운 입장이 되니까 적당한 시선의 거리를 늘 유지하셔야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 마음으로 10년을 살면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눈이 생겨났던 거죠.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너무 좋았어요. 마치 치유되는 것 같은. 그래서 그 때 제가 개인적으로 너무 고맙다고 했어요.

 

                

              ▲ 1996년 푸른마을분야 서울특별시환경상을 받았던 한양주택단지 전경 (출처: 서울시)

 

스이: 강홍구 작가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겠어요?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도 궁금하구요.

 

: 강홍구 작가님은 10여 년 전에 불광동에서 사진 작업을 하려고 터를 잡으셨는데, 그 때가 재개발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그 당시 구파발 동네를 보면서 서울에 아직 이런 곳이 남아있다는 것에 놀라워하면서 무심코 사진을 찍기 시작하셨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이명박 당시 서울 시장이 뉴타운을 너무 빨리 추진했던 거죠.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막 찍기 시작하셨대요. 우리도 그 분 사진들을 보고 싶어서 연락을 드리고 인사동 사진전을 하실 때 찾아가서 만나뵈었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때 사진을 찍었을 때의 분위기라든가, 사람들이 너무 급하게 나가면서나 역시 재개발을 경험해봤지만 재개발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있고, 허망한 것도 있고, 내가 살던 공동체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내 정체성의 어느 부분도 갑자기 허물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당연하게 있던 것들이 갑자기 모두 없어지는 거니까요. 그 당시에 사람들이 너무 급하게 나가면서 앨범도 버리고 가신 분들이 있었대요. 그 이야기를 듣고 되게 놀랐어요. 오래된 자개장 같은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니까 버리고 갔는데, 문짝을 하나 떼어서 그것도 보관하고 계신대요.

 

그런 정서가 있는 분이라서 버려진 물건들을 다 작업실에 모아두고, 사진도 슬라이드로 만들어 두셨더라구요. 그런 작업들은 지역에서 보호가 되어야 하는데.. 그 분도 웹박물관을 만들어서 자료들을 모아두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되게 좋은 생각이죠. 웹박물관을 만들면 은평구에서 나왔던 문화유적들을 누구나 다 올릴 수 있고, 이 세대가 떠나면 함께 없어질 이야기들도 보존해둘 수 있으니까요.

스이: 은평구에 문화 유적이 많이 있나 봐요.

 

: 우리 같은 경우는 50프로 이상은 서울을 떠돌다가, 혹은 지방에서 올라와서 정착한 제 2의 고향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이 곳이 자기가 태어난 곳이잖아요. 소위 말하는 '고향'인데, 그 고향에 대한 어떤 문화적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사실 들여다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아요. 은평에. 특히 진관동은 그린벨트로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것도 있고 이쪽 인근에 왕릉이나 매장 문화도 있어서 문화 유적의 흔적들이 많은 거예요.

 

: 예전에는 환관들이 살던 마을이 이 근처에 있었대요. 마을 옆에 환관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묘를 차례차례 쓰면서 세월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한 번 덮이잖아요. 그 위에다 또 쌓았대요. 그걸 덮고 또 덮고 해서 아파트처럼 되어 있었대요. 그게 폭포동 맞은 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아파트가 세워져 있어요. 상상만 해도 대단하잖아요. 정말 관들이 주욱 늘어져 있었대요. 은평구청에도 사진이 남겨져 있다고 하더라구요.

 

우리가 안타까웠던 지점 중 하나가, 은평구에서 나왔던 유적들이 모두 지금 서울역사박물관 창고에 들어가 있어요. 몇 년 전에 은평구에서 나온 역사 유적만 가지고 특별전을 한 적이 있어요. (재개발 하는 도중에) 너무 많이 나와서. 조선시대부터 유적들이 다 있으니까. 사실은 그런 것들이 은평구 지역 박물관으로 있는 게 가장 좋은 거죠. 그 때도 그런 목소리를 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적이 있어요. 강홍구 선생님도 안타까워하시면서, 지역 박물관이 어려우면 웹박물관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주셨던 거죠.

 

스이: 다음 사업으로 제안을 하셔도 되겠어요.

 

: 그렇죠. 그렇게 인터뷰이들을 만나다보니 조금씩 아이디어가 확장되는 것 같아요 


           

           ▲ 강홍구 작가의 <폭포동>, 2009 (출처: 한겨레)

 

스이: 주민 분들을 인터뷰하시다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을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씀해주시겠어요?

 

: 되게 재미있던 게, 지혜 씨 남편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진관동에 오랫동안 몇 세대에 걸쳐 사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마을 이야기 구술, 채록하면서 마을 분들의 가족사진을 좀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혜 씨가 추석 때 시댁에 가서 집안의 가족사진들을 다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이 집안이 갈현동에 22대손으로 살고 있다는 거를 처음 알게 된 거에요.

 

스이: 22?

 

지네: 예전에도 사진을 본 적은 있어요. 근데 그 날은 시아버지에게 옛날 사진 다 보여줄 수 있는지 직접 여쭤보았죠. 막 꺼내 오신 사진을 봤는데, 다 쪽진 머리인 거예요. 조선 시대 말기 혹은 근대 초기 사진 같은. (웃음) 평소에는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만 많이 들었거든요. 예일여고 쪽이 다 논이었고 연신내에서는 진짜 하천이 흘렀고, 그런 이야기들. 그런데 이번에 알게 된 건 갈현동에서 22대를 살았다는 거예요. 남편을 10년 이상 알아왔지만, 그 이야기는 처음 들었어요(웃음). 아이들이랑 사진을 보면서 남편의 증조할머니도 찾아보고 그랬는데, 그 배경들이 예전 동네 모습을 다 담고 있는 거죠.

 

스이: 22대면 조선시대부터 살았던 건가요?

 

모두: 거의 그렇죠.

 

: 그 때는 고양군에 속하는, 은평구가 서울이 아닐 때였죠.

 

지네: 모두 농사 짓고 연신내가 진짜 흐르고 이럴 때.

 

: 1세대를 30년으로 따지면 600년이니까, 조선시대 초기부터.. (모두 웃음)

 

스이: 천도할 때부터(웃음)

 

지네: 22대손이라는 건 믿을 수 없어요 (웃음)

 

: 22대손의 역사를 가져오다가 몰락한 가족? (웃음)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이고어쨌든 본인도 자기 가족에 대해 몰랐던 내용을 새롭게, 화제로 삼아서 이야기해볼 수 있고, 특히 아이랑 이야기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는 게 굉장히 재미있는 경험인 거죠.

 

뉴타운 주민 한 분과의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관동 프로젝트 팀은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카페를 나섰다. 그들을 따라서 아파트 길을 걸어 나오는 동안 아파트 단지 내부의 길과 나무들이 달리 보이는 듯 했다. 인터뷰 전, 물푸레 카페를 찾아가는 길에 '계수나무에서는 솜사탕 냄새가 난다'면서 처음보는 나무의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던 문명희 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가 만들어냈는지 모를 개발의 논리에 밀려 삶과 공간을 빼앗겼던 이들의 목소리 일부가 진관동 프로젝트 덕분에 영상과 음성, 문자의 형태로 남겨지고 있다. 직접 카메라와 녹음기, 펜을 들고 자기 마을의 기억을 기록해나가는 이들의 미디어 작업이 계수나무 이야기만큼이나 애틋하게 느껴졌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