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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12월_이슈] 마을미디어에 ‘있다’ - 마을미디어의 정치와 그 의미

by 공동체미디어 2014. 1. 13.

[서울마을미디어센터 뉴스레터 '마중' 2013.12.31]

 

 

마을미디어에 있다

-마을미디어의 정치와 그 의미

 

이희랑

(미디어교육 활동가, 서울시 마을미디어연구 프로젝트 연구자)

 

 

마을미디어 활동은 공동체미디어 운동과 보다 직접 민주적인 방식으로 정치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풀뿌리 운동이 만나 동시대성을 담지한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마을미디어 활동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마을미디어는 정치적인 것이다

 

정치하면 먼저, 정치인들이 떠오르고 특정 정당들이 이어서 떠오른다.

그렇다면 마을미디어교육이나 활동이 특정 정치인을 혹은 정당을 옹호하는 활동이라는 말인가? 아니다. 오히려 정치의 관행을 바꾸는 활동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석학 랑시에르는 통치로서의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별함으로써 정치를 전복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할 것을 권한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기간의 정치가 특정 엘리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정적 지도와 국가 통치의 원리를 담고 있다면, ‘정치적인 것이란 드러나지 못했던 사회의 개별 구성원 하나 하나가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충돌하며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공적 존재로 주체화되는 실천을 의미한다.

정치철학자 아렌트는 공공의 영역에 공적으로 나를 현상할 수 있는 자유가 파괴된 형태를 가리켜 전체주의로 정의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 스스로가 직접 자유롭게 표현하고 소통하고 관계되지 못할 때, 분절되고 고립되고 그래서 공공의 영역이 철저히 묵살되고 사라질 때 고개를 쳐드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이며 파시즘이다.

마을미디어활동은 침묵하고 있던 내가 입을 열고 눈을 반짝이며, 귀를 열게 하는 활동이며, 고립되고 분절되어 있는 나를 당신에게 연결시키고 만나고 대면하게 하며, 소통하게 하는 활동이다. 미디어에 연결하고 액세스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고립되어 침묵하고 있던 마을의 지성들이 외현으로 드러나고 만나지고 연결됨으로써 사건화된다.

민주주의 꽃은 선거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제 전환적인 발상이 필요하다. 민주주의 꽃은 나를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마을미디어활동이다.

 

그러므로 마을미디어 활동은 국가와 자본의 통치에 의해 가려 보이지 않았던 가 드러나고 만나는 것이 전제되는 활동이자 그러한 과정 자체이다.


▲  마을미디어축제에서 마을미디어의 정치와 의미에 대해 발표 중인 이희랑 연구자



마을미디어에는 내가 있다.

 

6일을 꼬박 노동하는 봉제노동자가 있고, 50년을 넘게 정주하며 살아온 어르신 왕언니가 있고, 어떤 이유에서 떠돌다 정주를 시도하고 있는 예술하는 젊은 청년이 있고, 전직 사회복지사 그러나 지금은 마을 카페가 참 궁금한 떡집아저씨가 있다. 내 영화를 꼭 만들어 보고 싶은 연륜 있는 시민활동가가 있고, 여전히 음악의 꿈을 간직한 택시아저씨가 있고 참 애교스러운 공무원도 있다. 그리고 마을자랑이 너무 자연스러운 다큐멘터리 감독이 있다. 함께 살기를 하기 위해 꿈틀거리며 거리로 나오는 장애인이 있다.

마을미디어에는 하나로만 호명할 수 없는 다양한 가치를 탑재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마을미디어 활동은 이러한 천 개의 사람들이 다시 천개의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워 하거나 즐거워하고 기특해하는 과정에 있다.

한 장의 편지글에 자신의 노동의 역사의 한 켠을 담아 소개하는 여성노동자는 한국사회에 그리고 우리 가족의 중요한 역사의 한 부분으로 칭찬받고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우리 일만 하진 말아요라고 마이크를 잡고 이웃의 노동자들에게 권하기 시작한다.

마을의 골목길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아줌마 앵커는 드라마는 보지 않아도 이제 케이블TV에서 전해주는 용산뉴스는 꼭 챙겨보기 시작한 자신의 변화가 참 기특하게 느껴진다. 조선일보나 한겨레신문처럼 큰 세상을 보여주는 신문만 옳다고 믿고 살아온 중1 2 자녀를 둔 여성참여자는 광고 찌라시로만 여겼던 마을신문을 꼬박꼬박 챙겨보기 시작했고 그것이 참 재미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냥시작한 마을미디어활동에서 지금은 밤늦게까지 편집에 몰입하며 어떻게 이 활동을 지속시킬 것인가 해답을 찾고 있는 젊은 아저씨도 있다. 내가 노동하는 낮 시간에 이루어질 우리 마을 협동조합 소식을 기록하지 못해 안타까운 심정들과 열망이 있다.

마을미디어 활동에서 현상하며 드러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는 정치적 인간이다. 미싱돌리는 앵커, 80먹은 취재 기자, 장애인 촬영감독은 자신의 존재와 역사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마을을 상상하고 재현한다.

 

그래서 마을미디어에는 행정 지도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마을의 미래, 사람들이 꿈꾸고 소망하는 마을이 보인다. 소망하는 마을을 향한 다양한 징후들이 현실을 가로지르며 쌓여 있다.

 

마을미디어를 보면 마을이 보인다.

 

마을미디어 활동을 통해서 보이는 마을은 나의 노동의 현장이며 그 노동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행위로서 인정받는 역사적 공간이다. 오다 가다 만나는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고 즐거운 작당을 모의하고 현실화시켜내는 놀이터이다. 내 아이를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이웃이 함께 아이를 키워야하는 교육의 장소이기도 하고, 냄새나는 쓰레기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공무원과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하는 행정의 공간이기도 하다. 함께 살리고 싶은 재래시장이기도 하며 그 재래시장에서 이루어진 공개방송이 울려퍼지는 거리이기도 하다. 자본의 축적이 아닌 공유과 협동이라는 대안적 생산과 소비를 꿈꾸는 마을기업의 노동현장이며, 마을일자리에서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머리 하얀 어르신들이 노동하는 아파트 동네이다. 밀양어르신들의 외침에서 보였던 우리 동네의 슬픈 송전탑이 보인다.

마을미디어 활동은 천 개의 마을을 만들면서 마을 사람들의 천 개의 관계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마을, 마을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추상적인 선언이 아니며 구조물을 새롭게 올리거나 영토로 기획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일상적 삶의 터전에서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내가 살고 싶은 마을로 의미화하며 이야기를 발견하고 기록함으로써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만든다. 마이크와 카메라로 이웃을 대면하면서 이해와 공감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내고 그러한 관계로 단단해지는 내가 살고 싶은 마을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정치적인 주체로서의 나의 권리가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고 실천과 참여, 변화로 드러나는 현실이 지루할 만큼 오래 반복되고 지속되는 공간이다.

 

마을미디어는 이렇게 마을을 바꾼다. 마을미디어가 나를 주체로 구성하고 마을을 바꾸고 새롭게 형성해 가는 과정은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의 미디어를 생성하고 소통의 구조를 변화시켜 낸다.

동시에 같은 것을 보고 들으며 상상하며 함께 호흡하고 사고하며 느끼는 공공의 장. 마을사람이 예술을 하는 작은 음악회, 별별시장, 신흥시장 바자회의 용감한 공개방송, 책으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이야기하는 마을극장’. 동네 반찬가게 앞이 바로 미디어가 되고 마을 공장들이 플랫폼이 된다. SNS로 카카오톡으로 온라인을 따라 흐르는 무형의 네트워크 역시 마을미디어 광장으로 반짝거린다.

미디어는 광장이 된다.

 

그런데

지금 이 마을미디어 사업이 물거품이 되면 어쩌지, 우리는 걱정스럽다.

크게 부풀어 올라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진 거품은 무너지는 순간도 한순간이다.

그러나

몽글 몽글 다양한 모양과 크기가 겹겹이 중층적으로 쌓이고 덮이며 이끼처럼 사방 팔방으로 퍼져 나가는 거품집은 절대 한 순간에 무너지지 않는다. 겉넓이와 반쪽 지름이 제각기이며 공기의 밀도 그 차이가 각기 다른 오만가지 거품의 덩어리들 엉겨 붙어 있듯이 그렇게 함께 있는 마을미디어는 결코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끊어지면서도 다시 이어지는 거품 덩어리처럼 질기게 지속되고 겹겹의 소통을 준비하는 마을미디어가 되기 위해서는 일렬 종대 NO!

우리 모두 오늘 기상천외한 실험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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